블록체인: 문제를 찾고 있는 해결책 (Blockchain: A Solution Looking for a Problem)

SJ
12 min readFeb 1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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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그 다음에 해결책

사업 아이템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순서는 문제를 먼저 발견하고 그 다음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다”라는 문제를 발견한 다음 “밥을 먹어야겠다”는 해결책을 찾고, “심심하다”라는 문제를 발견한 다음 “유튜브를 봐야겠다”라는 해결책을 찾는 것과 같은 단순한 것들로부터, “인터넷 검색을 해도 원하는 사이트가 안 나온다”라는 문제로부터 “웹사이트의 랭킹을 매기는 알고리즘을 써서 검색결과를 보여줘야겠다”라는 해결책을 찾거나(Google), “USB를 매번 들고 다니는 게 귀찮고 자꾸 잃어버린다”라는 문제로부터 “파일을 인터넷에 올리고 여러 기기 간에 동기화해야겠다”라는 해결책을 찾는 경우(Dropbox)와 같은 사업 아이템까지, 먼저 문제를 발견한 다음에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문제가 없으면 애초에 해결책을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보통 여러개 있기 때문에 설사 풀 수 있는 문제를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해결책을 미리 정해 놓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해결책을 찾을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을 미리 정해놓고 거꾸로 문제를 찾아 들어가는 경우

블록체인 기반 프로젝트들

그런데 2019년 2월 시점에서 많은 블록체인 프로젝트들, 특히 자신만의 토큰을 가지고 탈중앙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들을 돌아보면, “블록체인”이라는 해결책을 먼저 들고 그 다음에 이것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찾아 거꾸로 들어간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비트코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블록체인

처음에 “블록체인” 기술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블록체인은 사토시 나카모토가 기존의 P2P 전자 화폐가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였던 “이중지불 문제(double-spending problem)”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 끝에 탄생한 해결책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문제, 그 다음에 해결책). P2P 전자 화폐의 이중지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트코인이 택한 “블록체인”이라는 방식은 이중지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최선의 해결책이었으며 지금도 일정 부분 유효합니다.

2008년 10월에 공개된 사토시의 비트코인 백서의 Introduction에는 이렇게 써져 있습니다.

In this paper, we propose a solution to the double-spending problem using a peer-to-peer distributed timestamp server to generate computational proof of the chronological order of transactions.

— Satoshi Nakamoto (2008)

2019년의 블록체인: 해결할 문제를 찾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더리움이 나온 2015년 이후부터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블록체인을 지불 이외의 용도에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뒤로는, 또 특히 크립토 붐이 일어난 2017년 이후로는, 블록체인이라는 해결책을 들고 “이 기술을 어디에 적용할 수 있을까?”하고 거꾸로 해결책을 들고 문제를 찾아나가는 방식을 사람들이 사용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을 토대로 무언가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ICO라는 새로운 자금 모집수단과 합쳐지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탈중앙화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들이 생겨났고, 2017년의 ICO 붐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2018년 크립토 버블이 꺼지면서 사람들이 “거 봐라 비트코인이니 뭐니 그거 다 쓸데 없는 거다”, “너 비트코인 그거 아직도 하냐?” 이런 반응을 보이기에, “과연 블록체인 기술이라는 것이 비트코인 외에 사용된다는 것은 다 허상인가?”, “블록체인이라는 솔루션을 들고 해결할 문제를 찾아다니는 것은 헛짓인가?”라는 개인적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최근에 있었고 또 가장 유사한 형태의 버블이었던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닷컴 버블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좀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닷컴 버블

닷컴 버블의 역사는 Brian McCullough가 쓴 책 ‘How the Internet Happened: From Netscape to the iPhone’ (2018)을 참고했는데, 번역본은 아직 없지만 아주 재밌으니 웹의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씩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닷컴버블 때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니 2017–2018년에 크립토에서 많은 ICO 프로젝트들에게 일어난 일과 너무 비슷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위 책에 따르면, 당시 닷컴 버블 때는 이런 특징들이 있었습니다:

  •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약속을 하는 비즈니스 플랜 (크립토 버전: 세상을 바꿀 블록체인 기술)
  • 브랜딩과 마케팅에 돈을 쏟아부어서 인지도 올리기 (크립토 버전: ICO로 모은 펀드 중 마케팅 allocation 50%)
  • 이익이나 합리성과 아무 상관 없는 회사의 엄청난 밸류에이션 (크립토 버전: Coinmarketcap의 묻지마 밸류에이션)
  •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섹터에서 오프라인 스토어 비용을 없애겠다는 “Amazon for X” (크립토 버전: 모든 섹터에서 중개자를 없애겠다)
  • 주식시장에 회사가 쉽게 상장되고, 상장 직후 주식 가격 펌핑 후 하락 (크립토 버전: 거래소 상장 후 모든 토큰의 가격 그래프 똑같음 pump & dump)
  • 비즈니스 모델은 보지도 않고 묻지마 투자하고, 쉬운 IPO로 cash-out 했던 VC들 (크립토 버전: 비즈니스 모델이나 백서 검증 없이 프라이빗 세일 때 높은 보너스로 토큰 매입 후 거래소 상장 후 바로 던지는 크립토펀드)

그런데 또 한편으로 놀랐던 점이, 망한 닷컴 회사들을 찾아보기 전에는 비즈니스 모델이 말도 안 되거나 황당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 보니 대부분의 비즈니스 모델이 생각보다 멀쩡했고, 대부분은 2019년 현시점에서 다 실제로 돌아가고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Webvan

Webvan은 당시 가장 크게 망했던 닷컴 회사중에 하나인데, 1996년에 생겼고, 골드만삭스, 벤치마크 캐피탈, 소프트뱅크, 세콰이어 캐피탈에서 4억 달러가 넘는 투자를 받은 후, 1999년 6월에 서비스를 시작하고 1999년 가을에 거래소에 상장한 뒤(15불에 상장하고 첫날 34불까지 오름), 2001년에 파산했습니다. 어떤 말도 안 되는 서비스를 했나 하고 찾아봤더니 “온라인 식품 배달 서비스”였습니다(마켓컬리, Amazon Fresh, 쿠팡 로켓프레시, …).

Kosmo.com

또 크게 망했던 회사로 1999년에 창업하여 아마존 등으로부터 2.5억 달러를 투자받고 2000년에 상장 후 2001년에 망한 Kosmo.com이 있습니다. 무슨 이상한 서비스를 했나 하고 봤더니 “식료품, 비디오, DVD/CD, 책 인터넷 온디맨드 딜리버리 서비스”였습니다(배민, Doordash, Amazon, 쿠팡, …).

Broadcast.com

Broadcast.com은 1995년에 창업해서 1998년에 상장하고 1999년에 야후에 인수된 후 2002년에 서비스를 접었고, 비즈니스 모델은 “인터넷 라디오”였습니다(Podcast, SoundCloud, 팟빵, 스푼라디오, …).

그 외에도 많은 예가 있었는데, 망한 닷컴 회사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보고 느낀 것은 사람들이 의외로 생각보다 이상한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위 책의 저자도 아래와 같이 의견을 남겼습니다.

Plenty of dot-com startups were founded around concepts that were quite possibly good ideas but were just a bit too early for the time.

닷컴 스타트업들 중 많은 수가 상당히 좋았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토대로 창업되었지만 그 시기가 좀 너무 빨랐다.

- How the Internet Happened (2018), 153면

모든 것은 타이밍

2018년에 크립토 버블이 터졌지만, 탈중앙화 네트워크를 만드려고 하는 대부분의 ICO 프로젝트들이 생각한 아이디어가 허황되거나 말도 안 된다기 보다는, 대부분 현재 시점에서 타이밍이 너무 일찍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현재 탈중앙화 프로젝트와 유사한 모델을 가지는 탈중앙화 네트워크들이 활발히 돌아갈 거라고 믿고 있고 그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 생각에 현 시점에서 탈중앙화 네트워크들은 아래와 같은 걸림돌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mass adoption으로 가기에는 매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탈중앙화 프로젝트에의 걸림돌

현 시점에서 제가 느끼는 탈중앙화 프로젝트가 mass adoption으로 나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 UI/UX/키관리: 현 시점에서 어떤 탈중앙화 네트워크에서 토큰을 사용하기 위한 UI/UX는 아주 험난합니다. 브라우저에 Metamask를 설치하고 실제 토큰을 사용해보려고 시도해 보신 분들은 이 Lemon Coin 영상에 다들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How Dapps Work in 2018 ~ “Dawn of the Dapps”.
  • 유틸리티/증권성을 같이 가지고 있는 토큰: 대부분의 토큰들이 네트워크 내에서 사용이 예정된 유틸리티 토큰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네트워크가 잘 되면 가치가 오를 것을 예상하고 투자성이 있는 증권성이 섞인 하이브리드 형태로 되어 있어 성격이 불분명하고 사용성을 해치는 점이 있습니다.
  • 투자 목적으로 네트워크에 들어와 있는 ‘참여자’들: 앞의 하이브리드인 토큰의 성격과도 관련되어 있는데, 현재 대부분 프로젝트에서 네트워크의 참여자들은 네트워크의 성장과 유지에 기여하는 참여자들이라기보다는 토큰 가격 상승만 바라보고 들어와 있는 투자자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네트워크 참여자들의 구성이 좋지 않아 네트워크의 성장에 방해가 됩니다. (참고: Hashed 김서준 대표님의 ‘아무나 초기 프로젝트의 주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 토큰 이코노미(인센티브 모델)의 수정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점: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 토큰 이코노미가 이더리움 스마트 컨트랙트 기반으로 되어 있어, 토큰 이코노미가 예상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수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웹/앱 서비스 기획에서도 사업자들이 수없이 부딪히고 있는 것처럼, 처음에 설계한 토큰 이코노미가 사용자의 입맞에 100% 맞게 설계되어 문제 없이 그대로 돌아갈 확률은 거의 없는데,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비트코인 개발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Jimmy Song도 인터뷰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Jimmy Song: “I think ICOs are a broken business model” (9분 20초부터): https://youtu.be/GFtVLXXCge8?t=560, 그리고 저의 다른 포스팅 ‘블록체인 거버넌스 (Blockchain Governance) #1’ 참고).

그러면 지금 타이밍인 것은?

앞으로 어느 누군가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실제로 되는 프로젝트를 들고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프로젝트가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프로젝트는 블록체인이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는 못하는 것을 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그 프로젝트는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해 기존에 하던 것을 조금 더 좋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블록체인으로 하지 않고 기존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어떤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Amazon을 창업한 Jeff Bezos의 1997년 영상을 첨부합니다. ‘인터넷으로 책 판매하기’라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생각했냐는 질문에, Bezos는 “인터넷이 뜨고 있는데, 이 기술을 과연 어디에 적용할 수 있을까?”하고 해결책을 먼저 들고 거꾸로 문제를 찾아나가는 방식을 사용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정확히 맞춥니다).

Interview with Jeff Bezos (1997)

그런데 또 하나 재밌는 점은 그가 인터넷으로 커머스를 하기로 결정한 후, 첫 아이템으로 책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Bezos는, “책은 다른 어떤 모든 상품들보다 아이템의 개수(책의 타이틀 수)가 현저히 많고,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 서점이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는 구현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이템의 개수가 많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서점을 구축했을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인터뷰 중간의 아래와 같은 이야기는 지금 시점에서 블록체인 기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When you have that many items (*주:책은 종류가 많다는 뜻), you literally build a store that couldn’t exist any other way, and that’s important right now because the web is still an infant technology, basically right now, if you can do things using more traditional method, you probably should do them using the more traditional method.

그렇게 (책과 같이) 아이템 수가 많으면, 문자 그대로 (인터넷 스토어가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스토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건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데, 왜냐하면 웹은 아직도 초기 단계의 기술이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원래 하던 방식(*주:인터넷이 아닌 오프라인 방식)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면, 아마 그 방식대로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 Jeff Bezos (1997)

이 글은 더비체인(THE BCHAIN)에도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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